후릉 조선 제2대 정종 무덤 : 그 역사와 변천 과정

 조선시대의 왕릉 중 하나인 후릉은 그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통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 제2대 왕인 정종과 그의 비 정안왕후 김씨의 무덤인 후릉을 중심으로, 그 역사와 그것이 조선 후기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후릉의 위치, 구조, 그리고 조선 왕릉의 발전에 미친 영향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겠습니다.

후릉의 위치와 역사

 후릉은 조선 제2대 왕인 정종과 그의 비 정안왕후 김씨의 무덤으로,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왕후는 1412년에 먼저 세상을 떠나 후릉에 안장되었고, 8년 후인 1420년에 정종 역시 세상을 떠나 이 무덤에 묻혔습니다.

 

 후릉은 고려 공민왕릉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조선시대 왕릉들의 특징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위치와 구조로 인해 후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숙종의 후릉에 대한 인정과 그 영향력

 조선 숙종은 정종을 조선 제2대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하였습니다. 숙종은 정종이라는 묘호를 사용하고 국왕의 상징물을 제작하여 왕실 사당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후릉은 그 구조, 배치, 수량, 크기 등이 주목받게 되었고, 다른 왕릉을 조성할 때 참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숙종의 인정과 행동은 후릉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는 한편, 조선 후기의 왕릉 조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후릉의 형태와 조선시기 왕릉들의 발전

 조선시기 왕릉들은 대개 고려시대의 무덤 건축을 기초로 하여 규모를 확장하고, 돌조각물을 많이 배치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왕이나 왕비 중 한 명만을 묻은 무덤, 왕과 왕비를 한 봉분에 합장한 무덤, 왕과 왕비의 능을 가까이에 붙여 나란히 놓은 무덤, 그리고 왕과 왕비의 능을 좀 떨어진 딴 언덕에 각기 만든 무덤 등 네 가지 형태의 무덤이 만들어졌습니다.


 후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쌍릉 형태로, 이렇게 따로 만든 봉분의 형태는 조선 왕릉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구조와 특징

 후릉은 조선시대 왕릉의 기본적인 구조를 따르면서도 고려시대의 무덤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무덤은 맨 윗단에 봉분을 만든 다음 그 둘레에 12각의 병풍돌을 둘러 세우고, 일정한 면적에 바닥돌을 깔았습니다.

 

 이 바닥돌 바깥 둘레에는 법수를 세우고, 돌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때 12각으로 된 병풍돌 혹은 난간에 12지신상을 조각하여 형상화하였습니다. 봉분 뒤에는 난간 밖으로 일정한 사이를 두고 동, 북, 서의 세 면에 낮은 담장을 둘러쳤습니다.

후릉이 끼친 영향

 후릉은 그 복잡하고 세밀한 구조로 인해 다른 왕릉을 조성할 때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른 왕릉들, 특히 숙종의 명릉, 경종의 의릉, 그리고 숙종의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의 명릉 등은 후릉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이는 후릉이 조선 왕릉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역사적 가치를 더욱 높여줍니다.

결론

 후릉은 조선 초기의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그 복잡하고 세밀한 구조, 그리고 다른 왕릉에 끼친 영향력으로 인해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무덤 건축의 발전과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며, 우리 문화의 뿌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줍니다.

 

 조선 제2대 왕인 정종의 후릉은 단순한 묘지를 넘어서 역사와 문화의 중요한 교훈을 전해주는 곳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흔적을 이해하고, 그것이 현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또한, 후릉을 학습하고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문화 유산을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으며, 우리의 정체성과 아이덴티티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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